330척에 맞선 12척의 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에 한 명인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 도대체 왜 정유재란이 일어났으며 왜 이순신 장군은 망망대해 위에서 무수히 많은 적들과 대면했어야만 했는지, 유명한 3개의 해전 중에 하나인 명량대첩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명량]은 1597년 임진왜란 당시 전설적인 명량해전의 연대기를 그린 흥미진진한 영화이다. 김한민 감독이 감독하고 2014년 개봉한 이 영화는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해전을 담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뛰어난 전략적 능력과 조국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로 알려진 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중에 한 명인 이순신 장군이 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이끄는 일본의 강력한 함대가 한국 정복을 목표로 삼자, 이순신 장군은 압도적인 역경에 직면한다. 그는 소수의 전함 함대만을 가지고 일본의 진군을 저지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대담한 전략을 고안했어야 했다. 영화는 구루시마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한반도 전역에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적으로 열세이고 화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적과 맞서고 조국의 주권을 수호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일본 함대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명량 해협을 향해 진군하자 이순신 장군은 이 지역의 위험한 조류를 유리하게 활용할 기회를 포착한다. 그는 치밀한 계획과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으로 빈약한 함대를 배치하여 적군을 요격하고 파괴적인 반격을 펼친다. 명량해전은 소용돌이치는 해류와 위험한 물살 속에서 적군이 충돌하면서 전투는 좀 더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전술적 천재성과 선원들의 용기는 전투의 흐름을 바꾸어 일본 함대에 큰 손실을 입히고 한국의 놀라운 승리를 가져다줬다. 영화 전반에 걸쳐 관객들은 가슴 뛰고 숨 막히는 역사적인 전투신을 보게 된다. 이순신 장군과 선원들 사이의 동료애, 일반 선원들의 희생은 가슴 벅참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이순신 장군의 흔들리지 않는 리더십과 전략적 능력이 빛을 발하게 되어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한국의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으로 역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역사적인 기록, 명량대첩
명량대첩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조선 수군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유성룡 등의 권유로 이순신이 삼도수군사령관으로 복귀하였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은 군대를 모아 대열을 재편성했다. 당시 전쟁에 적합한 함대는 오직 12척 뿐이었다. 평민들이 기증한 13번째 선박이 그 수를 늘렸습니다. 한편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명량의 중요한 위치를 지키고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이순신은 8월 29일 이진과 어란포를 거쳐 벽파진으로 이주했다. 일본군의 야간 기습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 조치는 그들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명량을 후방에 두는 것이 취약함을 인식한 이순신은 9월 15일 조선 수군에게 우수영으로 이전하도록 명령했고, 다음날인 9월 16일 일본 수군은 명량에 입성했다. 이순신은 그들의 도착 소식을 듣고 신속히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명량으로 이끌었다. 자신의 배보다 10배 이상 많은 133척의 일본 함대에 맞서 이순신은 수로의 좁은 조건을 유리하게 활용했다. 이순신은 피난선을 최전선으로 위장하고 좁은 수로에 철창을 전략적으로 배치해 적선을 전복시키는 등 독창적인 전술을 구사해 능수능란한 방어를 펼쳤다. 압도적인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은 승리를 거두며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사실상 저지했다. 뛰어난 전략적 능력과 흔들림 없는 결단력으로 이순신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전쟁의 방향을 조선군에 유리하게 바꾸었다.
정유재란은 도대체 왜 일어났나?
제2차 임진왜란(1597~1598)이라고도 알려진 정유재란은 정치적, 군사적, 사회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전쟁이다. 발생하게된 이유는 아래와 같다 주요 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의 확장 정책 때문이었다. 히데요시는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으로의 확장을 위한 전주곡으로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대규모로 침략했다. 거기에 더불어 조선은 내부적으로 정치적 불안정과 분파주의로 내분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파벌들로 분열되어 외부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내부 불화는 외부 세력이 한국의 취약점을 악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냈다.